♣ 佛伽無問♣/♧ 輪廻 인연법♧

輪廻란무엇인가 ?

無 心 2008. 7. 5. 10:02

輪廻란무엇인가 ?
 
― 윤회의 원리 ―
 
집필자 : 김경집(동국대 불교학과 강사)

 

 

설법목표
불교의근본사상인 윤회사상의 원리에 있어서 《우파니샤드》에서는 어떠한 원리를 지니고 있는가를 살피며, 이어 초기 불교에서는 그러한 《우파니샤드》의 원리를 계승하여 어떻게 발전되어 왔으며, 어떠한 윤회의 원리를 지니게 되었는지를 이해시키는 데 그 목표를 둔다.

설법의전개
1.《우파니샤드》나초기 불교에서 보여지고 있는 초기 윤회사상을 먼저 이해시킨다.
2.《우파니샤드》와그 이전 인도사상에 있어서 윤회의 원리는 무엇이 었는가를 살펴본다.
3.초기불교에 있어서 윤회의 원리는 어떠한 것이 존재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예비지식
1.윤회: 사람, 초목, 동물을 막론하고 몸은 죽어 없어지더라도 업(業)은 영원히 살아 다른 육체에 옮아 수레바퀴가 돌듯이 멎지 않고, 여러 가지 환경과 생애에 새로 태어나 미(迷)의 생사를 끊임없이 되풀이 한다는 불교의 사상 및 세계관.

2.우파니샤드: 고대 인도의 철학서.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에 소속하며, 시기 및 철학적으로 그 마지막 부분에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베단타라고도 한다. 우파니샤드는 ‘가까이 앉는다’는 뜻으로 스승과 제자가 서로 대좌하여 전수하는 ‘비밀의 교의’를 의미하며 보통 오의서(奧義書)라고 번역한다.

3.아트만(自我):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 인식, 의욕, 행동의 주체가 자기를 외계(外界)나 타인과 구별하여 일컬음.

4.카르만(業): 조작(造作)의 뜻. 행위, 의지에 의한 신심(身心)의 활동, 의지에 의한 신심(身心)의 생활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업(業)을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으로 나눈다.

주제와관련된 경구, 어록, 격언, 속담
·태어난자들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죽는 자들은 틀림없이 다시 태어난다. 다시 몸을 받은 영혼은 낡은 육체를 버리고 새 육체로 바꾸어 입는다. 마치 어떤 사람이 낡은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바꾸어입는 것처럼. 《바가바드기타》

·태어남은죽음에서 생긴다. 보리가 움트기 위해서는 종자가 죽지 않으면 안된다. ― 간디 ―

·
윤회란 어떤 사람이 잘 익은 망고를 먹고 씨를 땅에 심었는데, 그 씨로부터 망고나무가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다시 그 나무에 열린 망고를 따 먹고 씨를 땅에 심어 다시 나무로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되는 것과 같이 계속 끝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미린다왕문경》

참고문헌
1.無我. 輪廻의 연구(윤호진 著, 민족사 刊)
2.佛敎의 靈魂과 輪廻觀(오형근 著, 불교사상사 刊)3. 불교문화사
(동국대출판부 刊)
4.중아함경, 잡아함경(동국대 역경원 刊)
5.설법자료집(대한불교진흥원 刊)
6.불교사전(홍법원 刊)

輪廻란무엇인가?(Ⅲ)


―윤회의 원리 ―

우리는지금까지 인도사상에서 보여지고 있는 윤회사상과 초기불교에서 보여주고 있는 윤회사상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두 번에 걸쳐 윤회문제를 다루다 보니 여러분들도 이젠 윤회가 무엇인가, 인간이라는 존재가 왜 생겨났으며, 인간의 현실적 문제는 윤회에서 비


롯되고 있음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단순히 윤회의 형태만을 안다고 해서 윤회의 전부를 이해한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그것은 윤회는 과연 어떠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떠한 원리로 윤회하게 되는지를 모르고서는 윤회를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지난번에 살펴보았듯이 《우파니샤드》에서는 윤회의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존재들은 이 세상을 떠나서 어떻게 이 세상으로 다시 옵니까?” 라는 직접적인 윤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먼저 아(我)라고 하는 아트만에 대해 말하면서 간접적으로 윤회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윤회의 모습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전자는 우리가 흔히 업(業)이라고 하는 카르만사상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윤회이며, 후자는 업(業) 즉 카르만사상이 들어있는 윤회사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첫번째 윤회형태와 두번째 윤회형태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 첫번째 윤회형태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보이고 있는 달이나 식물같은 매개물이 두번째 윤회형태에서는 보여지고 있지 않습니다. 둘째, 첫번째 윤회형태에서는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윤회가 지속되지만 두번째 윤회형태에서는 카르만과 같은 보편적인 법칙에 의해서 윤회가 됩니다. 셋째, 첫번째 윤회형태에서는 윤회의 주체가 되는 아트만과 같은 존재가 없지만 두번째 윤회형태에서는 그와 같은 존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상과같은 비교로 볼 때 첫번째 윤회의 형태는 완전한 모습을 갖추기 위한 과도기적 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고, 두번째 윤회의 형태는 윤회이론에 필요한 요소인 아트만과 카르만과 같은 요소를 갖춘 거의 완전한 윤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우파니샤드》에서 말하고 있는 윤회의 모습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말씀드렸는데, 다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세계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초기 불교에 있어서의 윤회는 인도사상, 《우파니샤드》에서 말하고 있는 윤회사상에서 채택하
고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윤회의 원칙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윤회하는 세계가 다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하는 세계는 다음번에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할 예정이므로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초기불교에 있어서 우리 중생들은 삼계오도의 세계를 윤회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세계를 도는 윤회의 전개는 끊임없이 돌고 도는 순환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계와 오도를 회전운동하는 것처럼 차례로 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으 로 태어나는 사람,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다시 지옥으로 태어나는 사람,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凡夫)들은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면 지옥, 아귀, 축생 속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시말한다면 천상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축생으로, 축생에서 아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천상에서 바로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인간에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지옥에서 인간이나 지옥으로 윤회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윤회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윤회사상과 초기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윤회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문제점은 이러한 윤회를 구성하고 있는 윤회의 요소는 무엇이며, 그 원리는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윤회사상을알기쉽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재생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생, 즉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면 어떠한 원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며, 어떠한 요소들이 존재하느냐는 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들입니다.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윤회의 요소
로는‘아트만’, ‘카르만’입니다. 이같은 요소들은 《우파니샤드》에서 보여지고 있는 초기의 모습이 아니라 후기의 모습에서 보여지고 있는 요소입니다. 여기서 아트만은 윤회의 주체이고 카르만은 아트만을 윤회하게 하는 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러한 요소들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아트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트만이라고 할 때 《우파니샤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아트만은 자아(自我), 또는 실체적이고 항구적인 성질을 가진 ‘개개
의영혼’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베다>나 <브라흐마나>에서 보여지고 있는 아트만은 이런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습니다. <베다>에서는 생(生)의 ‘호흡’, 즉 ‘바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이 ‘바람’은 신(神)들의 호흡과 같은 바람입니다. <브라흐마나>에서는 ‘아트만’을 제사 또는 제사의 결과에서 생긴 존재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존의 조건이므로 <브라흐마나>에서는 그것을 모든 존재의 영혼으로서 아트만이라 부르
고있고, 역시 사람들이 올리는 제물(祭物)이 다른 세계에서 그의 아트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다>와 <브라흐마나>에서 보여지고 있는 아트만은 불변의 요소가 아니라 육체와 함께 사라져버릴 수 있는 존재이며, 제사의 공덕이 다하면 고갈될 수 있는 존재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에비하여 《우파니샤드》에서 보여지고 있는 ‘아트만’은 항구적인 실체로서의 ‘자아(自我)’ 또는 각각의 영혼을 말하는데 가장 오래된 《우파니샤드》에서는 아트만은 존재의 내부에 있으면서 존재들을 살게 하는 존재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것에 의해 모든 것은 산다. 그것은 유일한 실재(實在)다. 그것이 아트만이다.”“사실 살아있는 영혼에 의해 버려진 존재는 죽는다. 그러나 영혼은 죽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는 것은 이 미세한 본질에 의해서이다. 그것이 유일한 실재(實在)이다. 그것이 아트만이다.”
그렇지만이러한 아트만은 완전한 정신적인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고 오히려 어떤 크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자주 보이고 있습니다. “내 심장 속에 들어있는 이 영혼은 쌀알보다도, 밀알보다도, 좁쌀보다도, 좁쌀의 눈보다도 작다.”그리고 뒤에 이루어진 《우파니샤드》에서는, “엄지손가락만큼 크다.” 등의 표현으로 아트만의 크기를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보다도 더 섬세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그 설명이야 어떻든간에 오래된 《우파니샤드》에서는 아트만을 순수한 정신적인 존재가 아니고 어떤 크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러한 생각으로 아트만을 이해하고 있었음
도알고 계셔야 다음 사항들이 쉽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아트만이 크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보니 이런 아트만이 우리의 몸 가운데 들어있어야 하는데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냐에 대한 궁금증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우파니샤드》에서는 이 아트만은 심장 속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우파니샤드》에서는 이 아트만이 육체 위에 올라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정신적인 아트만이 육체적인 아트만을 올라타고 있다.”라고
표현하고있는 것입니다.

이런아트만의 성질을 어떠한 것일까요? 아트만이 어떤 크기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누구에게 붙잡히거나, 파괴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존재로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멸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아트만은치는 충격으로 죽지 않고, 불구(不具)가 되지 않고, 불멸적이며, 그것은 성질상 파괴되지 않는다.”이런 아트만은 늙음도, 죽음도, 고통도, 굶주림도, 목마름도 모르며,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비록 아트만이 윤회하게 되어도 아트만의 성질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뒤에이야기하게 되겠지만 ‘카르만’이 아트만을 윤회하게 하지만 그 카르만도 이 아트만의 성질을 바꾸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트만은 선행에 의해서 커지기도 하고, 악행에 의해서 작아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또한 위에서 아트만이 어떠한 크기로 이해되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아트만은 카르만에 의해 커지지도 않고 작아지지도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우리가 중요하고 주의깊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아트만의 성질에 있어서 윤회의 과정 속에서도 자신의 성질을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같은 성질은 윤회 뒤의 세계가 바로 전생의 성질과 동일할 수밖에 없다는 윤회의 기초적인 부분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아트만 스스로는 볼 수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성질입니다. 이같은 것을 느끼는 것은 감각들인데 아트만은 이러한 감각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감각들과 아트만은 서로 헤어지게 되는데 목소리는 불 속으로 들어가고, 호흡은 공기 속으로 들어가고, 눈은 태양 속으로 들어가고, 정신은 달 속으로 들어가고, 귀는 공중으로 들어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우파니샤드》에서는 우리들이 장님이나 귀머거리들처럼 감각기능 없이도 살 수 있지만, 감각기능들과는 달리 아트만이 없다면 살 수 없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트만은 감각기능과 다르고, 어떠한 감각적 기능도 존재하지 않지만 육체와 결합하면 그
것은쾌락과 고통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트만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오면 쾌락도 고통도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아트만의 성질 가운데 또 하나의 특징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육체를 떠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잘 때 아트만은 육체에서 나와서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트만은 반드시 다시 육체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만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두려 할 때는 아트만은 완전히 육체를 떠나게 되며, 이때 그에게 붙어있던 카르만이 새로운 생을 향해 아트만을 이끌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트만이 육체를 떠나려 할 때는 아무 곳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트만이 크기를 가진 실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눈으로나, 머리로나, 육체의 어떤 부분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이제부터는 육체에서 빠져나온 아트만을 새로운 생으로 끌고가는 ‘카르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카르만’이라는 말은 ‘하다’, ‘완수하다’, ‘생산하다’, ‘준비하다’, ‘만들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일, 행동,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러한카르만의 개념은 간단하면서도 논리적입니다. 그것은 ‘심은 대로 거둔다.’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들이 현재 처하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들이 과거에 행한 행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즉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생을 결정하는 카르만은 그 앞의 생의 결과이다. 현재의 생은 옛날에 지은 카르만의 결과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날 다시 태어날 생의 상태를 결정한다.” 이러한 ‘카르만’에 대한 내용은 《우파니샤드》 이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물론 《우파니샤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베다>와 <브라흐마나>에서 말하는 카르만은 ‘행위의식’ 특히 ‘제사’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래된 《우파니샤드 》에서는 이와 같은 내용들이 보여지고 있음은 역시 윤회의 문제는 고대의 인도사상에서부터 전승되어져 온 사상임을 알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가 발전되면서 ‘보편행위’를 의미하게 되고, 특히 ‘윤리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로 사용되면서 윤회이론에 적합하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오래된 《우파니샤드》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설명은 <베 다>와 <브라흐마나>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들을 한층 발전시켜 인간의 미래가 주문이나 주술적인 의식, 또는 제사나 어떤 전능한 존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는
생각에이르게 됩니다. 죽은 사람은 그의 행위, 그의 처신에 따라 만들어지게 된다는 의미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좋게 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나쁘게 됩니다. 잘 처신하면 덕이 있게 되고, 처신을 잘못하면 악하게 된다고 하여 그의 행위대로 거두는 의미로까지 발전되게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파니샤드》의 설명으로 우리는 카르만의 일반원칙을 완전하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모든 것은 카르만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카르만’이론은 재생신앙을 진정한 하나의 이론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이론 없이는 ‘재생신앙’은 고대신앙의 한 부류에 불과하고,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이 의거할 수 있는 논리적이고 보편적인 하나의 이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카르만’이론이없다면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이나, 이해할 수 없는 불행, 또는 보상되어야 할 덕(德)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도에 있어서 이러한 이론 덕택으로 혼돈에서 질서가 잡히게 되었고, 하나의 형식에다 다양한 현상들을 포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삶과 죽음의 비밀을 설명해 주었고, 그래서 행복과 불행은 우연의 장난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행위에 달려있음을 확신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윤회사상은 ‘카르만’의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으며, ‘카르만’이 결과를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의 어느 순간에 끼어들게 될 여러 생(生)들의 연계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르만’이라는 말은 종종 윤회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카르만’이론은 그 모습을 나타내자 곧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들을 깊이 변화시키면서 그들의 중심교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내용은 불교의 윤회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사상적 바탕이 되고 있는 인도사상에서의 윤회원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은 그같은 이론이 불교에 이전되면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아윤회를가르치는 불교는 윤회의 주체로서 영속하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론의 기반이라면 누가 업(카르만)을 짓고 누가 그 업의 결과(과보)를 받는가?라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됩 니다.

이문제는 부처님 생존시부터 제기되고 있었고 우리 시대에 와서도 계속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부처님 당시부터 우리 시대에까지 완전하게 해결되지 못하고 많은 이론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러한 모순점을 극복하고 윤회사상을 수용하기 위한 윤회의 원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부처님 입멸 후 2세기 경부터 여러 부파들이 형성되고, 이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들, ‘필설(筆舌)로 표현할 수 없는 자아(自我)인 푸드갈라, 윤회하는 정신적 원리인 식(識)의 이론, 상속이론(相續理論)’ 등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럼먼저 푸드갈라 이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잡아함경》을살펴보면 3권 37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 어 있습니다. “나는 이제 무거운 짐과 짐을 버림과 짐꾼에 대해 말하리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어떤 것이 무거운 짐인가? 이른바 오온(五蘊)이다…. 어떤 것이 짐꾼인가? 이른바 푸드갈라(士夫)가 그것이니 그것은 어떤 이름을 가졌으며, 어떤 생(生)과 어떠한 가정(家庭)에 속했으며, 어떻게 먹었으며, 어떠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았는가?” 우리들은 이 비유에서 부처님이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5온과 구별되는 어떤 존재를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5온이 짐
이라면푸드갈라는 짐꾼이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5온을 짊어지고 있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통불교에의하면 존재를 이루고 있는 것은 5온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없지만 이 짐꾼의 비유에서는 5온 이외에 존재하는 다른 것이 틀림없이 있고 그것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입니 다. 이 짐꾼은 ‘아트만’, 또는 명백한 실체처럼 생각되는 자아(自我)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그 자아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윤회한다는 것이 푸드갈라의 이론입니다.

다음은식(識)의 이론입니다.
식(識)은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하나의 정신적 현상이며, 우리들의 여섯 개 감각기관에 따라 각각 생기므로 여섯 가지의 식(識)이 있습니다. 《아함경》에서 식(識)이 아트만과 같은 ‘생명원리(生命原理)’로 취급되고 있는 경우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러한 예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식(識)은 우리들의 감각기관인 육관(六根)과 육경(六境)과 관계없이 혼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며, 둘째, 식(識)은 그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며, 셋째로는 식(識)은 비록 그것이 미세하기는 하지만 어떤 크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식(識)에 대해서 《중아함경》을 살펴보면 부처님은,“식(識)이란 연(緣)을 인(因)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식(識)은 연(緣)이 있으면 생기고 연(緣)이 없으면 멸한다.”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것은 상주불변하고, 한 생(生)에서 다른 생(生)으로 윤회하는 자아(自我)와 같은 역할을 하는 식(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식(識)의 이론은 뒤에 대승불교에 이르게 되면 독립적인 사상체계로 까지 발전하여 하나의 학파로 형성되어 불교의 중요한 사상체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론입니다.

다음은상속(相續)의 이론(理論)입니다.
상속(相續)이란여기에서는 ‘계속하는 것,‘과보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상속이론에 의하면 ‘계속되고, 나아가고, 업(業) 때문에 더러워지기도 하고, 깨끗해지기도 하는 것’이 상속입니다. 그러나 상속은 매 순간마다 변합니다. 실체적인 존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속(相續)은 존재가 죽어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 속에 계속의 원리가 있고, 그것은 업(業)에 의해서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트만’과 같은 존재가 없어도 윤회와 과보의 법칙은 흔들리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상속(相續)에 대한 설명으로 《잡아함경》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우리의 이해를 쉽게 할 것입니다. “산개울물은 한 순간도 흐름을 멈추지 않고 쉼없이 계속 흐르면서 내려간다. 바라문아, 이처럼 사람의 삶도 이 산개울물과 같은 것이다.”쉬지 않고 흘러가는 산개울물은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계속됩니다. 이 산개울물의 비유는 어떤 존재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그것을 이어주는 주체(主體)없이도 계속할 수 있음을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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