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 心 2008. 8. 31. 15:55

 

십이연기설    

 

   모든 괴로움의 윈인 (集)

 

지난 시간에는 연기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연기하는 법계에는 존재도 시간도 없다는 것을 얘기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본래없는 존재와 시간이 집을 통해 어떻게 존재와 시간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연기설을 보면 노사의 괴로움이 연기하는 과정을 열거한 다음에 “이와 같이 순수하고 큰 괴로움 덩어리가 모인다.(如是 純大苦聚集)”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왜 노사의 괴로움을 연기한 것으로 설명하고 나서 “이와같이 괴로움이 연기한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괴로움 덩어리가 모인다.”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연기하는 법은 본래 시간 속의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 속의 존재가 아닌 법을 중생들은 존재로 인식합니다. 생사의 괴로움은 중생들이 시간 속의 존재가 아닌 법의 실상을 모르는 무명의 상태에서 살아가면서 삶의 통해 연기한 법을 욕탐으로 모아서 존재로 구성하여 인식함으로써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생사의 괴로움은 연기한 법이 욕탐에 의해 모임으로써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이야기하면서 괴로움 덩어리가 모이는 것을 집(集)이라고 합니다.

 

집의 원어는 ‘samudaya'인데 이 말을 분석해 보면 ‘sam'은 ‘함께’하는 뜻이고, ‘udaya'는 ’나타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samudaya'(集)는 어떤 것들이 모여서 함께 나타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들이 어떻게 모여서 함께 나타나는 것일까요?

 

비구들이여, 사문이나 바라문이 그들의 전생을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오취온을 기억함이다. “전생에 나는 이러이러한 몸(色)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그가 색에 대해서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은 기억된 마음이다.

 

“전생에 나는 이러이러한 감정(受). 이성(想). 의지(行). 의식(識)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그가 감정. 이성. 의지. 의식으로 알고 있는 것은 기억된 마음이다. 비구들이여, 그들은 무엇을 몸(色)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저해된다. 그러면 그때 몸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무엇에 저해되는가? 바람, 더위, 촉감 등에 저해된다. 이와 같이 저해되면 그때 몸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비구들이여, 그들은 무엇을 감정. 이성.의지.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느껴지고, 사유하고, 유위를 조작하고 분별하여 인식한다. 그러면 그때 감정. 이성. 의지. 의식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이 경에서 설명하고 있고 또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오온은 우리의 삶을 통해 생긴 체험의 내용이 모여서 통일적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위나 추위가 느껴지면 우리는 몸이 더위와 추위를 느낀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몸이라는 존재는 감촉된 체험의 내용이 기억속에 모여서 존재로 구성된 것입니다. 우리의 체험은 이렇게 기억 속에 함께 모여서 존재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오온은 체험의 내용이 모여서 함께 나타난 것, 즉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집은 ‘동일하게 체험된 내용이 마음에 기억되어 함께 나타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집은 항상 욕탐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체험의 내용이 모두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있는 내용만 기억된다는 것입니다. 존재는 이렇게 체험의 내용 가운데 애욕과 희탐, 즉 관심이 있는 내용이 기억속에 모아져서 함께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생기는 체험의 내용은 연기한 것입니다.